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쿠다 다케오 (문단 편집) === 출생부터 총리 임명까지 === [[1905년]] [[군마현]] 군마군 카네코마정[* 現 [[군마현]] [[타카사키시]]]에서 태어났다. 최대 정적이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것과 반대로 후쿠다는 [[에도 시대]] 마을 촌장 격인 쇼야(庄屋)를 대대로 지낸 지역 유력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후쿠다는 어릴 때부터 똑똑해서 [[신동]]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고등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당대 최고 명문인 [[구제고등학교|제1고등학교]]를 거쳐서 역시 최고 명문 학부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이후 [[고등문관시험]]에도 수석으로 합격해서 대장성(現 [[재무성]])에 들어가게 된다. 대장성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서 들어간지 1년도 안 된 신임 관료가 주영 일본대사관에 재무관으로 가서 3년여간 근무했을 정도였다. 이후 대장성의 핵심 부서인 주계국[* 예산 편성을 담당하는 곳으로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재무성의 핵심이다. 한국 [[기획재정부]]에서 [[예산실]]이 핵심인 이유와 같다.]에서 승진을 거듭해 국장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대장성 주계국장은 거의 무조건 다음 인사에서 사무차관으로 승진하는 자리로, 대장성 관료 중 명백한 2인자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왕징웨이 정권|왕징웨이 괴뢰정권]]의 재정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쇼와전공이 정부 관료들에게 뇌물을 뿌린 [[https://ko.m.wikipedia.org/wiki/%EC%87%BC%EC%99%80%EC%A0%84%EA%B3%B5_%EC%82%AC%EA%B1%B4|쇼와 전공 사건]]에 연루되어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을 거쳐 무죄판결을 받기는 했으나, 이 일을 계기로 대장성에 사표를 내고 물러나게 된다. 대장성을 나온 뒤, 관료계의 선배인 [[기시 노부스케]]의 권유로 고향 군마현의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정치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한동안 [[무소속]]으로 지내다가, 이후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에 입당했고 1958년 자민당 정조회장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인 1959년에 자민당 간사장에 임명되었고, 그해 6월에는 농림수산대신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내각에 입성하게 된다. 1960년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자민당 정조회장에 취임하지만, 이케다의 고도 경제 성장 정책에 "이런 식으로 가면 3년 뒤에 경제가 파탄날 것"이라고 이케다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면서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 이케다 정권의 위세를 생각하면 간덩이가 단단히 부은 셈이었다.] 이를 지켜본 기시가 자신의 파벌을 일부 떼어주어서 후쿠다는 이를 바탕으로 '당쇄신 연맹'을 결성했고 비주류의 입장에서 이케다와 대립했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는 차세대 주자로서 부각되기 시작하는데 대장대신, 당 간사장, 외무대신을 지내면서 세간에는 사토의 뒤를 이을 자는 후쿠다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2차 임기를 지낸 사토는 1968년, 차기 총재 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형인 기시의 직계 후쿠다에게 총리직을 넘기려고 했었다. 그러나 사토의 직계였던 다나카는 후쿠다에게 총리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토의 3선 도전 무드를 조성했고, 결국 사토는 총리를 한 번 더 지내게 된다. 당연히 사토의 세 번째 총리 임기는 후쿠다와 다나카의 보이지 않는 차기 총리 주자 경쟁이 벌어진 시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각복전쟁]]). '일본열도 개조론'을 주창하며 대대적인 고도경제성장과 지역개발을 부르짖은 다나카와는 달리, 재무통이었던 후쿠다는 일본 경제가 안정에 들어선 만큼 균형재정과 안정적인 경제정책을 주장해 차이가 있었다. 또한 중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을 주장한 다나카와는 달리 후쿠다는 기시의 노선을 이어받아서 [[타이완]]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1972년, 사토가 세 번째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마침내 후쿠다와 다나카는 총리직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미 사토파 의원 대부분을 구워 삶은 다나카였던지라 결국 결선투표에서 다나카에게 패배해 총리의 꿈이 미뤄지게 된다. 그러나 후쿠다는 총재 선거 이후 '''"이제 곧 일본이 후쿠다를 필요로 할 때가 올것이다"'''라는 강경한 발언을 남겼다. 대신직에서 사임했으나, 1972년 12월 중의원 선거에서의 패배로 다나카가 초계파적인 내각구성을 하면서 행정관리청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73년, [[오일쇼크]]와 다나카의 무리한 확장정책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다나카는 내각을 개편하면서 후쿠다를 대장대신으로 임명했고 후쿠다는 감축정책으로 [[인플레]]를 억제하고자 노력했다. 1974년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자 후쿠다는 다나카를 비판하면서 [[미키 다케오]]와 함께 장관직을 사임했다.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가 다나카의 금권정치와 [[록히드 사건]] 연루의혹을 폭로하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다나카는 결국 1974년 12월에 사임했다. 본래 다나카는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던 [[오히라 마사요시]]를 총리로 내세우려고 했으나, [[시이나 에츠사부로]] 자민당 부총재가 '''"국민들이 뿔나있는 상황인데 이런식으로 나가면 앞으로 뭔일이 날지 모른다."'''라고 다나카를 반협박하는 바람에 결국 미키 다케오가 총리가 되게 된다.(시나 재정) 미키 내각에서 후쿠다는 다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청 장관에 임명되어 경제 안정에 주력하게 된다. 그러나 미키가 록히드 사건의 엄정 수사를 다짐하며 다나카를 압박하게 되자, 위기를 느낀 다나카는 미키를 끌어내리기 위해 자민당의 모든 계파들을 구워삶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최대 정적인 후쿠다에게도 연대를 제안했고, '''총리직에 욕심이 있던 후쿠다는 이를 낼름 받아먹었다.''' 결국 미키파와 나카소네파를 제외한 모든 자민당 계파가 반미키로 돌아섰고 1976년 선거 패배로 미키는 결국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미키 내림) 이때 후쿠다는 재빨리 손을 쓰게 되는데, 다나카와 긴밀한 사이였던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연대를 제안했다. 오히라도 이 제안에 응해 결국 양측 사이에 밀약이 맺어지게 된다.(오후쿠 밀약사건) 밀약의 내용은 '''후쿠다가 2년 총리를 한뒤에 오히라에게 총리직을 넘겨준다.'''라는 것이었다. 오히라가 후쿠다와 연대해버리면서 다나카도 손을 쓸 방도가 없게 되어, 자민당 총재선거는 후쿠다가 단독 입후보해 투표없이 총재가 되었고 정부수반 지명투표에서 과반을 조금 웃도는 득표로 마침내 대망의 총리가 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